좌파는 계급적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마르크스의 계급은 그의 이론에서 *생산수단을 선점한 부르주아 자본가 계급과 생산 수단이 없어 노동력을 팔 수 밖에 없는 임금 노동자 즉 프로레타리아 계급 두 가지로 선명하게 나뉜다. 현대 좌파들이 말하는 계급(가진자/못가진자)은 이보다 애매한데 왜냐하면 생산수단의 유무가 아니라 재산의 다소에 따라 계급을 나누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과학주의에서 돋아난 사상이고, 어떤 숫자가 많거나 적다는 말은 과학적 용어가 아니다. -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사회주의는 유물론과 잉여가치론을 갖춤으로써 과학으로 되었다. 그리고 이제 이 과학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들의 세부 항목들과 상호 연관들을 보다 깊게 연구하는 일이다.” – 프리드리히 엥겔스
재산이 많다/적다는 것은 비교 대상을 상정한 뒤에 따질 수 있다. 즉, “A의 재산이 B의 재산보다 많다.” 혹은 “A의 재산이 10년 전의 A의 재산보다 줄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비교대상이 없이 그냥 “A는 부자다.”고 했을 때도 우리는 암묵적으로 “2011년 대한민국에서 A의 재산이 전체 평균보다 많다”, 또는 요샛말로 좀 돋는 얘기지만 “자신보다 많이 많으면 부자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A의 부나 빈곤을 말할 때, 소말리아 인민들의 생활수준이나 노르웨이 국민들의 평균적인 소득과 비교해 표현하지 않는다. 100년전이나 10년 후의 경제상황을 기준으로 A의 빈부를 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 모두는, 묵시적으로 가정하는 시공의 영역(현재 한국사회, 현재 나의 재산)에서 그의 빈부를 상대평가한다. 그래서 한국의 부자가 노르웨이에 가면 중산층이 될 수도 있고 소말리아에서는 한국의 빈자가 부자로 둔갑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은퇴 후에 동남아로 이민가는 한국의 중산층은 계급 혁명을 이룬게 된다. 이러한 빈부의 개념은 보편성을 담보하지 못하므로 과학적이라 할 수 없고 따라서 사회주의가 아니다.
급진적 휴머니즘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는 그래도 ‘가난과 노동의 불일치’라는 문제의식과 그를 바로잡는 실천적 과제를 제시하려 시도한 공로가 있다. 원조 좌파들의 노동 운동은 이론의 옳고 그름을 떠나 담론의 출발점에 진정성이 있었다. 하지만 한국 좌파가 줄창 휘두르는 계급적 프레임의 오류는 그들이 설정한 가진자/못가진자 라는 계급 그 자체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빈부 논란에서 소외되는 현대 산업사회의 중산층 즉 세부 담론에 따라 양쪽을 넘나드는 중간계급은 이원론적 시각의 사각지대로 오작동하여 모순계급이 된다.
강남좌파라는 말은 부유한 생활을 하면서 좌파적 사상을 가진 사람을 뜻한다. ‘그냥 좌파’들이 경제적 평등주의를 강조하는 바탕에는 유물론이 있고, 유물론은 물적 생활의 생산양식이 사회적,정치적, 정신적 생활과정 전체를 규정한다는 생각이다. 강남좌파는 마르크스가 그랬던 것처럼 유물론을 따르면서 유물론을 극복한 사람들이다. 아래는 조국 교수가 경향에 기고한 글의 일부분이다.
“나는 지역주의의 수혜지역인 경상도 지방에서 남성으로 자라나서, 입시경쟁의 승자가 되어 대학에 들어간 후 미국 물까지 먹고 돌아왔으며, 집값 비싼 강남 지역에 거주하면서 학벌의 정점이라는 대학에서 교수를 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유명한 정식,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에 따르면, 나는 지금 숭미 보수우파로 활약하고 있어야 할 게다.”
유물론은 인간의 의식이 그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지배한다는 생각**인데, 조국 교수의 의식은 예외적으로 그의 사회적 존재의 지배로부터 탈출하였고,
“그런데 나는 사회적으로 반대 성향의 사람으로 분류되고 있으며, 나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신자유주의나 시장만능주의를 버리고 사회민주주의적 운영원리를 대폭 받아들여야 한다고 판단하고 행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벗들은 생래(生來)적 진보가 아닌 자가 의지(意志)적 ***진보를 견지,지향한다고 종종 나를 놀리기도 하는데…”
여전히 그는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라고 주장한다. 조국 교수는 그러니까 과학주의를 따르지 않고 유물론에도 해당하지 않으면서 학력이나 재산은 가진자 계급에 속하지만 스스로를 좌파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오른 손으로 밥을 먹고, 글을 쓰고, 공을 던지면서 여전히 왼손잡이라고 고집을 피우는 격이다. 그가 이런 오류에 빠져있는 데는 다른 이해할 만한 이유가 있다.
“일찍이 맹자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맞다. 다른 사람의 어려운 처지에 애틋한 마음이 피어나는 현상은 짐승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고, 사람만의 특성인 것으로 보인다. 측은지심은 우리 인간만의 아름다운 특성이다. 맹자님이 측은지심이 좌파의 특성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오래전 공자는 위정자를 향하여 불환과이환불균(不患寡而患不均) 즉 백성들이 적게 가진것을 걱정하기 보다 고르지 못한 것을 걱정하라고 설파한 바 있다. 이 ‘고르지 못함’은 단지 개인의 선의나 자선으로 해결될 수는 없으며, 법적,제도적 개혁이 수반되어야 해결될 수 있다. ”
조국 교수가 선의나 자선을 언급한 것을 보면 마치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도움을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제도적으로 하자는 말처럼 들린다. 불환과이환불균은 그런말이 아니다. 공자님이 위정자에게 경고하신 ‘고르지 못함’은 어려운 사람들의 절박한 사정을 돌보라는 뜻이 아니다. 불환과 즉 ‘적게 가진 것을 걱정하기보다’는 빈곤을 먼저 염려하라는 뜻이 아니다. 공자님은 ‘절대 빈곤’ 보다는 ‘상대적 박탈감’을 염려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니까 공자님의 가르침은 위정자에게 백성들의 질투심을 걱정하라는 뜻이다. 오늘날 조국 교수와 같은 상류사회 엘리트의 충족되지 않는 질투심을 바라보면서 공자님의 혜안이 새삼스럽다. (위의 문구를 선전에 인용했던 마오는 수 천만명을 학살하였고, 중국 사회주의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조국 교수가 측은지심에 이어 불환과이환불균을 들고 나온 수순은 전형적인 위선적 좌파의 논변이다. 굶는 아이로 시작해 전면 급식이 나오고, 형편이 어려운 대학생에서 시작해 무조건 반값 등록금이 기어 나온다. 이타심은 질투심을 채우는 핑계가 되고, 맹자와 공자는 조국 교수의 강남좌파적 프레임 속에서 교묘하게 왜곡된다. 공맹이 좌파면 길거리 전봇대도 좌파다.
강남좌파는 철학적 용어가 아니다. 강남좌파는 좌파적 생각으로 우파적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이다. 강남좌파는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닌, 철학도 과학도 아닌 그냥 기형적인 어휘일 뿐이다. 강남좌파는 좌파의 부분집합이 아니라, 양두구육(羊頭狗肉)하는 무리들의 한 부분이다. 곽교육감은 한 토론 프로그램에 나와 무상급식을 주장하면서 ‘공교육’이라는 말을 염불처럼 외우고 아이들의 차별없는 평등주의 교육을 강조하였는데, 곽교육감의 아이는 알고보니 김포외고에 다니고 있었다. 이럴 때 우리는 교육감이 강남좌파라고 골리는 것이다. 강남 좌파는 원조 좌파에게 한 수 배우고 오기 바란다.
자신의 실천으로 나타난 만큼만 정확히 자신의 사상이다.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1899년 베른슈타인은 소위 ‘노동 운동에서의 이론과 실천의 문제’를 제기하여 유명한 수정주의 논쟁을 촉발하였다. 실제로 임노동자 정도의 생활을 하는 ‘토지(생산수단)를 소유한 독일의 영세 농민들’에 대한 정책은 그들 사이에서 민감한 정치적 대립을 유발했다.
**그러니 예수믿는 사회주의자는 대체 무슨 말일까?
***스스로를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좌파적 이념을 가진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인류의 진보를 가로막고 있는 두 가지는 좌파 사상과 부도덕이다. 100년이 넘은 실패한 사상을 아직도 부르짖는 좌파들이야말로 진보가 아니라 ‘수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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