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김용익 교수에게 드리는 글

이 글은 서울대학교 김용익 교수가 한겨레에 기고한 부자가 해서는 안 될 일에 대한 의견이다.

(원문 링크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03304.html )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글은 프레임 오류가 어떤 것인지 배울 수 있는 아주 좋은 글이다. 또한 합리적, 이성적으로 세상을 파악해야 할 과학적 프레임에 오류를 야기하는 심적 동력이 어떠한 종류의 것인지에 대한 힌트를 얻기에도 적절한 글이다.

 

1. ‘80 20’의 사회가 마음을 울리더니 어느새 1%에 대한 99%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김용익 교수는 글을 이렇게 시작했다. 여느 좌파와 마찬가지로 부자와 가난한 자라는 프레임으로 글을 시작해 버렸다. ‘사회희망’, ‘아름다움도 그렇지만 부자라는 말은 잘 정의되지 않는다. 상위 50%를 부자라고 할 수도 있고, 8:2로 나눌 수도 있고, 이 글에서와 같이 99:1로 구분할 수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적절한 부자의 정의는 나 보다 돈이 많은 사람들이지만, 일단 상위 1%를 부자라고 해 보자. 이러면 김 교수는 부자에서 제외되나 보다.

 

2. 탈세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

탈세는 하면 안 된다. 하지만 김교수의 말처럼 상위 1%의 탈세만을 선별적으로 문제삼기 위해서는 그들의 탈세가 일반의 탈세와 견주어 유의미한 차이를 보여야 한다. 그런가? 자영업자들의 소득 포착율은 60%선이다. 30%이상의 소득에 대한 세금이 탈루되고 있다.

(관련 자료 : http://www.joseilbo.com/news/htmls/2007/12/2007121764338.html )

그래서 상위 1%의 탈세가 일반인들(여기서 탈세할 일이 없는, 세금을 한푼도 내지 않는 소득 하위 50%정도의 사람들은 제외한다.)의 탈세율을 확연히 초과한다는 증거가 없다면, 탈세는 상위 1%부자에게만 문제 삼을 수는 없다. 탈세를 문제 삼고 싶으면 (1% 99%)가 아니라, (소득신고를 제대로 하고 세금을 내는 사람) vs (소득을 숨기고 세금을 안 내는 사람) 이라는 깨끗한 프레임이 있다. 또는, (월급쟁이 대 자영업자)의 프레임으로, ‘자영업자가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

(유리 지갑으로 불리는 봉급 생활자들은 거의 100% 세금을 잘 내고 있는데 그 이유가, 우연히도 봉급 생활자들은 다 정직한 사람들이고 대한민국 자영업자들의 30%정도는 부도덕한 탈루범이라서 일까? 봉급 생활자들의 소득을 비밀에 부치고 자진 신고하라고 했을 때도 이들은 모두 정직하게 소득신고를 할 것인가? 이 문제는 보이는 것만큼 대단한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다. 자영업자나 부자들이 세금을 빠져나가는 것은 그들이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민 1% 99% 중 누가 더 정직하냐의 문제가 아니다. 설사 부자가 부도덕하다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가난한 자가 도덕적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도덕성에 있어서는, 1% 99%든 내 생각에는 둘 다 거기서 거기다.

카드 사용으로 자영업자들의 세원포착율이 10%정도 늘었다고 한다. 탈세든 다운계약서든 타겟을 정하고 편파적으로 비난하기 전에 방법을 강구할 문제다.)

 

3. 혹시 청와대에 있거나 국회의원이라면 집 사는데 예산을 쓰거나 그건 당신들의 돈이 아니다. 시장의 부자들이 세금을 안 내고 정부의 부자들이 재정을 축내면 나라에는 뭐가 남겠나?

아주 좋은 말씀이다. 이건 소득 상위 1%에 해당하는 정치인들 뿐아니라, 모든 권력을 가진 정치인들이 새겨 들어야 할 말이다. 돈이 많은 정몽준 의원이나 이명박 대통령 뿐 아니라 집이 가난할 것으로 예상되는 민주 노동당의원들도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 정치인들이 혈세를 개인적으로 쓰는 것은 정치인들이 돈이 많기 때문이 아니라 권력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예는 소득 상위 1%와는 무관하다. 교수님도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정부의 부자들이라고 표현한 듯 하다. 그런데, ‘정부의 부자들은 대체 무슨 말인가? ‘부자라는 말을 끼워넣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요상한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오를 턱이 없다. 서울대학교에서 수재들을 가르치는 김 교수는 교수사회의 부자란 말인가?

 

4. 피부 관리에 1억씩 쓰지 마라.

김교수께서는 장애아를 둔 나경원 의원의 피부과 비용 영수증을 믿을만한 언론을 통해서 확인하시고 이런 글을 쓰기 바란다. 설사 나경원 의원이 1억을 자신의 피부관리에 다 썼다 하더라도 김 교수께서 하라마라 할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재산을 어디에 쓰는지 관찰하는 일은 김교수 같은 교양있는 사회의 지도층이 할 일이 아니다. 누가 외제차를 타고 다니고 고급 피부 관리를 받는 장면이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면 그것은 내가 그를 질투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드러낼 뿐이다. 자기를 사랑하고 자신의 일과 취미에 집중하는 자존감이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소비 행태에 크게 상처받지 않는다. 그런 일에 시간낭비 하지마라.

 

5. 두들겨 패고 맷값을 주지 마라.

두들겨 패기만 하라는 뜻인가? 사람을 패고 나서 돈을 던져주는 일이 막장 드라마 만큼 시선을 끄는 소식이긴 하지만, 이 사태의 근본은 폭력이다. 폭력은 소득수준에 관계없이 나쁜 일이다. 내가 알기로 이런 일이 단 한 건 있었다. 상위 1% 99%보다 더 사람을 잘 때린다는 증거가 없다면 이런 말은 참았어야 했다. 폭력에 유난히 알러지가 있다면, 얼마 전 경기도에서는 조폭들이 자기들끼리 치고 받으며 지랄을 했다는데 그들에게도 한마디 하시기 바란다. 어린이 집에서 아이들을 패는 선생들을 핑계로 우리나라 99%는 썩었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아침 드라마 즐기는 교수님이 아니라면 중심을 잡자.

 

6. 군대는 가라. 감옥가면 아프지 마라. 공무원 검찰 언론을 매수하지 마라.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을 두고하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상위 1%정도의 재력이 있어야만 저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은 상위 1% 99%에 비해 차별적으로 저지른 비리와 잘못이고 교수님의 빈부 프레임은 이 지점에서 비로소 합리적이다. 인정한다. 전체 글에서 부분적이나마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은 6번 뿐이다. 그러나 특정 범죄가 아니라 일반적인 법치의 관점에서 보면 99% 1%에 비해 범죄율이 더 높다.

 

7. 불쌍한 경비원 아저씨, 청소부 아줌마 무단히 자르지 말고 월급 좀 올려달라.

경비원이나 청소부 아줌마를 해고하거나 적은 월급으로 고용하는 일은 누가 보아도 딱한 일이다. 이들은 잘리면 거리로 내몰리고 굶어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돈도 많은 사람들이 월급 몇 십만원 더 줘도 될텐데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감성을 잠시 접어두고 이성으로 한번 바라보자.

이들은 누군가에 의해 고용당하지 않으면 더 열악한 생활을 해야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일을 해야 한다. 누가 지금 이들을 고용하고 있는가? 교수님도 나도 이들을 고용하고 있지 않다. 교수님이 분개하고 훈계하고 있는 그 부자들이 이들을 고용하고 있고, 이들의 생활은 그들에 의해 그나마 지탱되고 있다. 수입이 턱없이 미흡하다. 맞다. 하지만 이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교수님이나 나같은 구경꾼들이 옆에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더군다나 고급 아파트 단지 주민들에게 경비원의 월급을 올려 주라는 교수님의 조언은 어떤 자존심이 강한 경비아저씨를 부끄럽게 만들고 그를 모욕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혼자 착한 척하지 말고 가만 계시라.

파키스탄에는 법이 있지만, 아동노동이 아직도 만연해 있다. 다국적 기업의 횡포에 분개하는 사람은 많지만, 이 불쌍한 아이들 중 하나라도 성인이 될 때까지 책임진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 저임금으로 아이들을 착취하는 기업을 규탄하지만, 이런 탐욕스런 회사라도 없다면 그들은 굶거나 테러단체로 흘러간다.

 

8.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부르짖지 말라.

그렇다. 이 말은 계층간 이동이 제한된 계급사회에서나 어울리는 말이다. 현대 경쟁 사회는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고, 또 부자도 쉽게 무너지는 구조다. 부자는 늘 부자고 가난한 자는 늘 그 굴레를 벗지 못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다른다. 자유기업원 자료에 따르면, 80년대 초 10대 대기업 중 현재 4개 기업만 그 안에 남아 있다. 매출액 대비 50대 기업 중 오직 26%만 지속적으로 포함되어 있고, 자수성가한 기업인들도 많다. 닭고기로 유명한 하림은 병아리 11마리로 시작했고, 숙취 해소 음료 여명808의 그래미, 엔씨 소프트, NHN, 뽀로로의 아이코닉스 등 수 많은 회사들이 맨땅에서 일어났다. 미국에서도 현금성 자산 100만불 이상의 부자중 80%가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9. 당신들이 조금만 베풀어 주면 입시지옥도 청년실업도 중년 과로사도 노인 자살도 비정규직 차별도 없어질 것 같다.

그렇지 않다.

 

10. 삶이 오죽 팍팍하면 젊은 것들이 새끼를 못낳겠다고 하겠나?

인간들은 삶이 팍팍할 때 더 많이 출산한다. 아프리카 빈국들이 삶이 넉넉해서 새끼를 까대는 것이 아니다. 우리 할아버지들의 삶이 우리보다 팍팍하지 않아서 자손을 많이 본 것이 아니다. 삶이 팍팍하다는 말은 삶이 상대적으로 기대에 못 미친다는 말이지 절대적으로 더 팍팍해졌다는 뜻이 아니다. 경제 성장이 부침이 있지만, 우리는 과거에 비해 확실히 조금씩 잘 살고 있다. 교수님은 삶이 불만인 사람들을 선동하지 말라.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기록적인 빈곤을 극복한 우리 선배 세대가 들으면 귀싸대기를 맞을 지도 모른다.

 

우리 교수님의 글이 뒤죽 박죽이 된 것은 부자와 가난한 자라는 좌파적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은 세상을 믿는 양과 안 믿는 양으로 나눠서 보고, 여성주의자는 남녀로 구분하며, KKK는 피부 색깔로 사람을 나눈다. 그럼에도 이 글은 큰 인기를 끌고있다.

 

사회주의 운동이 대중성을 획득하는 심리적 바탕에는 질투가 자리잡고 있다.

 

 


좌파가 잡스를 추모하는 일은....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다. 사회주의 이념을 가진 좌파들이 잡스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혁신은 자유 시장 경제 아래에서만 가능하다. 나는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노벨상을 받은 사람의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다.

양극화를 걱정하시는 분들께 드리는 글.

양극화는 지구적 현상이긴 하지만, 사실 지구적 규모에서 양극화가 심화된 것은 아니다. 국가간 교역 규모가 확대되고 국내 분업이 세계적 분업으로 커지면서 부의 이동이 활발해진 결과가 양극화 현상이다. 한국이나 미국과 같은 나라의 양극화가 심해진 것은 중국 인도 등의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부가 이동하고 결과적으로 마치 중산층이 이들 나라로 이민간 것처럼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양극화를 걱정하시는 분들이, 우리가 양극화로 고통받는 대신 중국 인민들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었다는 팩트를 크게 고려하지 않는다 해서 편협하다 할 수는 없다. 대구의 한 지하철에서 웬 미친넘이 불을 질러 사람들이 다치고 죽으면 ‘매우’ 안타깝지만, 일본에서 요상한 옴진리 어쩌구 하는 정신 나간 종교 지도자가 사린 가스를 풀어 그 보다 몇 배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도 그냥 ‘조금만’ 안타까운 것은 인지 상정이다.


양극화는 빈익빈 부익부라는 말로 자주 환언되는데 이 표현의 절반은 옳지 못하다. 경제가 성장하면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모두 더 잘 살게 된다. 다만 부자가 더 부자가 되는 속도보다 빈자의 형편이 나아지는 속도가 늦어서 둘 간의 격차가 벌어지기는 한다. 그렇다고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해지는 것은 아니다. 양극화는 소득 격차를 지적하는 말이고 자본주의가 빈곤을 극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 국가 내부에서 격차가 벌어지는 현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빈곤이 완화되는 한 양극화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이 문제를 무척 심각하게 여기는 분들은 그럴수도 있다고 받아들인다. 조국 교수는 그런 분들 중 한사람이다.


다음은 조국 교수가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의 일부이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5&artid=19471&pt=nv)

사실 공자는 위정자를 향하여 불환과이환불균(不患寡而患不均) 즉 백성들이 적게 가진 것을 걱정하기 보다 고르지 못한 것을 걱정하라고 설파한 적이 있다. 이 고르지 못함은 단지 개인의 선의나 자선으로 해결될 수는 없으면 법적 제도적 개혁이 수반되어야 해결될 수 있다.”


조국 교수의 말대로 양극화를 해결할 방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전 국민을 소득에 따라 줄을 세우고 맨 앞에 있는 사람부터 주머니를 털어 뒤에 있는 사람에게 적당히 나누어주면 된다. 개인의 재산권을 조금 포기하고 국가가 강제력을 이용해 소득을 재분배하면 양극화 문제는 금새 완화될 수 있다. 나는 오늘 그런 개입주의 정책이 성장을 갉아먹고 우리 사회를 결국 사회주의로 이끌고 갈 것이라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국가가 나서서 소득을 재분배하기 전에 조국 교수와 같이 양극화를 걱정하시는 분들이 해야 할 일을 알려드리기 위해 펜을 들었다.

조국 교수의 소득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대한민국 평균보다는 분명 많겠고, 그리서 그는 소득 상위 50%에 속한다. 양극화를 없에기 위해서 그는 그의 소득 중 일부를 저소득층에 이전해야 할텐데, 그의 말마따나 이런 식으로 양극화 문제가 한방에 해결될 수는 없다. 프리드먼이 ‘선택할 자유’시리즈에서 비유한 대로 그의 자선(가령 월 100만원)은 대양에서 한방울의 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의 자선은 양극화를 해소하는 길에서 한방울의 물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없기는 하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제도나 법이 개혁되었다고 하자. 제도가 있다고 해서 조국 교수께서 갑자기 1조나 100조의 세금을 부담할 능력이 생길리는 만무하고, 법과 제도가 있는 상황에서도 양극화를 완화하는데 기여할 그의 몫은 여전히 100만원 정도일 것이다.

양극화 해소를 위한 그의 진정성과 일관성을 가정한다면, 법과 제도가 없어도 그는 매월 100만원을 기부하여야 하고, 법과 제도가 완비되어 있으면 그는 100만원을 불평하지 않고 기꺼이  세금으로 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문제에 관한 조국 교수의 행동요령은 매우 단순하다. 지금처럼 법과 제도를 개혁하는 일에 경주하는 한편 이와는 별개로 그는 매달 100만원을 기부하면 된다. 나중에 법과 제도가 정비되면 기부를 멈추고 그 돈을 세금이라는 형태로 바꾸기만 하면 되는데, 이 일은 매우 간단하다.

법과 제도가 없는 상태에서의 자선은 양극화를 부분적으로 제거하는 일이고 법과 제도는 양극화를 전체적으로 해소시키는 일이다. 부분적인 제거를 거부하면서 전체적인 제거를 주장할 수는 없다. A가 B를 돕는데, C가 D를 도와주기 시작하면 그 때 자신도 시작할 것이라는 조건은 돕지 않겠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독신을 고집하면서 인구 감소를 걱정할 수는 없다. 마을에 아이가 없어 마을이 없어지게 생겼다고 걱정하면서, 동네 사람들이 아이를 낳기 시작하면 그때 나도 아이를 낳겠다는 말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양극화를 걱정하시는 분들은 연간 소득과 기부금 영수증을 먼저 보여주시기 바란다.


대학생들은 지금 반값 등록금 투쟁 할 일이 아니라...

우리 대학생들은 지금 반값 등록금 해달라고 시위할 때가 아니다. 오히려 반값등록금, 무상급식, 각종 연금을 포함한 모든 보편적 복지 정책을 당장 집어치우라는 요구를 담은 집회를 열어야 할 시점이다.

대학생들은 그들의 앞세대가 자신들의 미래소득을 땡겨 쓰려 하고 있는데 앉아서 보고 있기만 할 셈인가?

현명한 대학생들의 과감한 행동을 촉구한다.

강남좌파

좌파는 계급적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마르크스의 계급은 그의 이론에서 *생산수단을 선점한 부르주아 자본가 계급과 생산 수단이 없어 노동력을 팔 수 밖에 없는 임금 노동자 즉 프로레타리아 계급 두 가지로 선명하게 나뉜다. 현대 좌파들이 말하는 계급(가진자/못가진자)은 이보다 애매한데 왜냐하면 생산수단의 유무가 아니라 재산의 다소에 따라 계급을 나누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과학주의에서 돋아난 사상이고, 어떤 숫자가 많거나 적다는 말은 과학적 용어가 아니다.

사회주의는 유물론과 잉여가치론을 갖춤으로써 과학으로 되었다. 그리고 이제 이 과학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들의 세부 항목들과 상호 연관들을 보다 깊게 연구하는 일이다.” – 프리드리히 엥겔스

재산이 많다/적다는 것은 비교 대상을 상정한 뒤에 따질 수 있다. , “A의 재산이 B의 재산보다 많다.” 혹은 “A의 재산이 10년 전의 A의 재산보다 줄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비교대상이 없이 그냥 “A는 부자다.”고 했을 때도 우리는 암묵적으로 “2011년 대한민국에서 A의 재산이 전체 평균보다 많다”, 또는 요샛말로 좀 돋는 얘기지만 자신보다 많이 많으면 부자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A의 부나 빈곤을 말할 때, 소말리아 인민들의 생활수준이나 노르웨이 국민들의 평균적인 소득과 비교해 표현하지 않는다. 100년전이나 10년 후의 경제상황을 기준으로 A의 빈부를 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 모두는, 묵시적으로 가정하는 시공의 영역(현재 한국사회, 현재 나의 재산)에서 그의 빈부를 상대평가한다. 그래서 한국의 부자가 노르웨이에 가면 중산층이 될 수도 있고 소말리아에서는 한국의 빈자가 부자로 둔갑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은퇴 후에 동남아로 이민가는 한국의 중산층은 계급 혁명을 이룬게 된다. 이러한 빈부의 개념은 보편성을 담보하지 못하므로 과학적이라 할 수 없고 따라서 사회주의가 아니다.

급진적 휴머니즘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는 그래도 가난과 노동의 불일치라는 문제의식과 그를 바로잡는 실천적 과제를 제시하려 시도한 공로가 있다. 원조 좌파들의 노동 운동은 이론의 옳고 그름을 떠나 담론의 출발점에 진정성이 있었다. 하지만 한국 좌파가 줄창 휘두르는 계급적 프레임의 오류는 그들이 설정한 가진자/못가진자 라는 계급 그 자체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빈부 논란에서 소외되는 현대 산업사회의 중산층 즉 세부 담론에 따라 양쪽을 넘나드는 중간계급은 이원론적 시각의 사각지대로 오작동하여 모순계급이 된다.

 

강남좌파라는 말은 부유한 생활을 하면서 좌파적 사상을 가진 사람을 뜻한다. ‘그냥 좌파들이 경제적 평등주의를 강조하는 바탕에는 유물론이 있고, 유물론은 물적 생활의 생산양식이 사회적,정치적, 정신적 생활과정 전체를 규정한다는 생각이다. 강남좌파는 마르크스가 그랬던 것처럼 유물론을 따르면서 유물론을 극복한 사람들이다. 아래는 조국 교수가 경향에 기고한 글의 일부분이다.

나는 지역주의의 수혜지역인 경상도 지방에서 남성으로 자라나서, 입시경쟁의 승자가 되어 대학에 들어간 후 미국 물까지 먹고 돌아왔으며, 집값 비싼 강남 지역에 거주하면서 학벌의 정점이라는 대학에서 교수를 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유명한 정식,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에 따르면, 나는 지금 숭미 보수우파로 활약하고 있어야 할 게다.”

유물론은 인간의 의식이 그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지배한다는 생각**인데, 조국 교수의 의식은 예외적으로 그의 사회적 존재의 지배로부터 탈출하였고,

그런데 나는 사회적으로 반대 성향의 사람으로 분류되고 있으며, 나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신자유주의나 시장만능주의를 버리고 사회민주주의적 운영원리를 대폭 받아들여야 한다고 판단하고 행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벗들은 생래(生來)적 진보가 아닌 자가 의지(意志) ***진보를 견지,지향한다고 종종 나를 놀리기도 하는데…”

여전히 그는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라고 주장한다. 조국 교수는 그러니까 과학주의를 따르지 않고 유물론에도 해당하지 않으면서 학력이나 재산은 가진자 계급에 속하지만 스스로를 좌파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오른 손으로 밥을 먹고, 글을 쓰고, 공을 던지면서 여전히 왼손잡이라고 고집을 피우는 격이다. 그가 이런 오류에 빠져있는 데는 다른 이해할 만한 이유가 있다.

일찍이 맹자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맞다. 다른 사람의 어려운 처지에 애틋한 마음이 피어나는 현상은 짐승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고, 사람만의 특성인 것으로 보인다. 측은지심은 우리 인간만의 아름다운 특성이다. 맹자님이 측은지심이 좌파의 특성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오래전 공자는 위정자를 향하여 불환과이환불균(不患寡而患不均) 즉 백성들이 적게 가진것을 걱정하기 보다 고르지 못한 것을 걱정하라고 설파한 바 있다. 고르지 못함은 단지 개인의 선의나 자선으로 해결될 수는 없으며, 법적,제도적 개혁이 수반되어야 해결될 수 있다. ”

조국 교수가 선의나 자선을 언급한 것을 보면 마치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도움을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제도적으로 하자는 말처럼 들린다. 불환과이환불균은 그런말이 아니다. 공자님이 위정자에게 경고하신 고르지 못함은 어려운 사람들의 절박한 사정을 돌보라는 뜻이 아니다. 불환과 즉 적게 가진 것을 걱정하기보다는 빈곤을 먼저 염려하라는 뜻이 아니다. 공자님은 절대 빈곤보다는 상대적 박탈감을 염려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니까 공자님의 가르침은 위정자에게 백성들의 질투심을 걱정하라는 뜻이다. 오늘날 조국 교수와 같은 상류사회 엘리트의 충족되지 않는 질투심을 바라보면서 공자님의 혜안이 새삼스럽다. (위의 문구를 선전에 인용했던 마오는 수 천만명을 학살하였고, 중국 사회주의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조국 교수가 측은지심에 이어 불환과이환불균을 들고 나온 수순은 전형적인 위선적 좌파의 논변이다. 굶는 아이로 시작해 전면 급식이 나오고, 형편이 어려운 대학생에서 시작해 무조건 반값 등록금이 기어 나온다. 이타심은 질투심을 채우는 핑계가 되고, 맹자와 공자는 조국 교수의 강남좌파적 프레임 속에서 교묘하게 왜곡된다. 공맹이 좌파면 길거리 전봇대도 좌파다.

 

강남좌파는 철학적 용어가 아니다. 강남좌파는 좌파적 생각으로 우파적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이다. 강남좌파는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닌, 철학도 과학도 아닌 그냥 기형적인 어휘일 뿐이다. 강남좌파는 좌파의 부분집합이 아니라, 양두구육(羊頭狗肉)하는 무리들의 한 부분이다. 곽교육감은 한 토론 프로그램에 나와 무상급식을 주장하면서 공교육이라는 말을 염불처럼 외우고 아이들의 차별없는 평등주의 교육을 강조하였는데, 곽교육감의 아이는 알고보니 김포외고에 다니고 있었다. 이럴 때 우리는 교육감이 강남좌파라고 골리는 것이다. 강남 좌파는 원조 좌파에게 한 수 배우고 오기 바란다.

자신의 실천으로 나타난 만큼만 정확히 자신의 사상이다.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1899년 베른슈타인은 소위 노동 운동에서의 이론과 실천의 문제를 제기하여 유명한 수정주의 논쟁을 촉발하였다. 실제로 임노동자 정도의 생활을 하는 토지(생산수단)를 소유한 독일의 영세 농민들에 대한 정책은 그들 사이에서 민감한 정치적 대립을 유발했다.

**그러니 예수믿는 사회주의자는 대체 무슨 말일까?

***스스로를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좌파적 이념을 가진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인류의 진보를 가로막고 있는 두 가지는 좌파 사상과 부도덕이다. 100년이 넘은 실패한 사상을 아직도 부르짖는 좌파들이야말로 진보가 아니라 수구.

 


1 2